언니가 친구 집에서 피아노를 한 대 주워왔다. 조율 기사 아저씨가 불평을 하며 조율을 하고 갔다고 한다. 열 층 아래 집이니 예슬이를 위한 이모의 배려일 것이다.
피아노 학원에 간지 이제 4개월 되었나,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스피드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이엘 곡을 치는 예슬이를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그 흡수력이 놀랍기도 하다. 학원이 뭔지도 모르는 조그만 것이 6살부터 가고 싶다는 것을 8살이 되어서야 보냈다.
길 찾기도 못하는 것을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빌어 피아노 학원 차까지 태워 보낼 생각은 없었다. 가훈이나 교육에 대한 원칙 같은 것은 없지만 우리 집에서는 스스로의 열의가 있어야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박한가? 그래도 얼마나 좋은가, 의지가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
국민학교 2학년 정도였을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피아노 선생님이 올 시간이 되어 같이 수업 구경을 했다. 음계랑 피아노 음을 듣고 아마 절대 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피아노 음 하나하나가 참 아름다웠고, 너무나 명확하게 들렸다. 친구는 영 맞추질 못했다. 그건 ‘라’라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유가 전혀 없는 집이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하고 싶다는 말을 한번인가 했었는데,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다시 얘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중학교 때 가게에 술 값을 대신하여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던 기타 한 대를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아 왔다.
세고비아의 양산형 기타로 흰 바탕에 보라색 그라디에이션 처리가 되어 있는 멋진 포크 기타였다. 몇 달을 습한 곳에 있어서였는지 기타 줄은 녹슬었지만 울림통이 비틀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서 초보 기타 입문 한 권과 기타 줄 한 세트를 무작정 사서 갈아 끼웠다.
집안에 절대 음을 알 수 있는 것이 하모니카 밖에 없어 하모니카를 한번 불고, 한 옥타브 위의 음을 떠올리며 기타 줄을 내 마음대로 맞추었다. ‘라 미, 라 미, 라 미, 라 미, 라 미...’머리 속에 그려지는 울림.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악 실기 시험을 보는데, 친구들은 주로 피리, 하모니카, 피아노를 연주했다. 특이하게 팬플릇을 연주한 친구가 있었고 난 기타를 들고 갔다. 클래식 기타를 배운 친구와 둘이서 백조의 호수를 연주했는데,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 1학년 2학기에 과에서 친한 친구를 따라 노래패에 놀러 갔다가 그대로 주저 앉았다. 동아리 방에는 구형 코르그 키보드가 있었는데, 기스 나고 낡은 외형과는 달리 소리가 좋았다. 기계를 만지는 기쁨과 소리가 난다는 즐거움이 함께하여 동아리 방이 참 근사하게 느껴졌었다. 피아노 소리보다 70번 대에 있던 트럼펫 소리가 더 운치 있어 멋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동아리 방을 정리하다 발견한 낡은 바이엘 1권을 들고 연습을 했다. 이래 저래 시간은 없었지만 수업과는 담을 쌓은 지라 어쩌다 보니 2권까지는 했던 것 같다. 물론 바이엘 1-2권 독학이 내게 남겨 준 건 없었다. 만학의 열정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기회가 없었던 것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그랬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슬이는 자랑하고 싶었던 몇 곡을 득달 같이 친 뒤, 총알처럼 뛰어나가고, 난 그 빈 자리에 앉았다. 어찌 살다 보니 악보란 걸 본지가 10년이 넘었다. 솔인지, 라인지, 오선지를 벗어난 음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비야, 그리고 한 곡 더. 어눌하지만 음표의 흐름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왼손이 잘 따라 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박자를 따라 억지 음을 만들어 간다. ‘피식’하고 웃음이 흐른다. 그래도 손가락이 음표를 따라 가네.
낡고 검은 피아노 한 대가 머리 속 한 켠의 오랜 기억들을 갑자기 끌어낸다.
홍대 클럽, 후배 몇 명이 직장인 밴드를 만들고 작은 공연을 한다. ‘우뚝 서리라’대신 ‘난 네게 반했어’를 부르는 후배를 본다. 기타를 쳤던 훈이는 베이스를 들고, 드럼을 치던 식이는 리드 기타를 키보드를 치던 연이는 서브 기타를 들고 있다. 모두 학교 때와는 다른 포지션이다. 맥주 한 병을 두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후배들에 섞여 소리에 파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