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적, 이름은 익숙한데 말야
언제 처음 봤을까, 길드에 가입하면서부터 볼 수 있던 이름이어서 그런가 이름만은 익숙하다. 드라마 왕초를 본 적이 없으니 특별히 익숙한 이름도 아닌데. 그냥 골드문 만큼이나 간간히 플레이를 하는 분이려니 했어. 49렙은 저 멀리 하늘 같은 렙이었지만 가덤 이후 좀 달려서 그런지 어느 새 동렙이 되어 있었지.
어느 날 만난 곳은 ‘저주받은 땅’.
이틀 전 전사와 함께 저주받은 땅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보이는 건 다 잡으면 되는 곳이라 은근히 즐거움으로 넘쳐흐르던 땅이었어. 저주를 받은 곳이건 말건 상관 없단 말이었지. 그런데 이 곳 혼자 뛰어보니 몹은 엄청이 튼실한데다가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공룡 같은 선몹 때문에 은근히 고전을 면할 수 없는 곳이었지.
무두질 조곡은 저주받은 땅에 울려퍼지고
스킬을 찍으러 아포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향해야 하나 살펴보고 있으려니 구마적 님이 그곳에 있었어. 긴긴 솔로잉 생활에 비슷한 렙의 누군가와 파티를 한다는 건 거의 가뭄에 단비 같은 일이야. 그래서 조용히 가도 될 것을 ‘저 갑니다!’ 라고 신나라 외치며 저주받은 땅을 향했어.
이름에 걸맞게 황량한 곳, 오른쪽 앞 언덕만 넘어가면 마적님이 있겠지. 띄엄띄엄 있는 몹을 피해 언덕의 치마자락을 따라 돌 듯 마적님을 찾아갔어.
『슥슥슥』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몹 소리도 아닌 것이 이 고요함을 가르고 있었어.
『마적님, 왔어요!』
지도를 펼쳐 들면 분명 근처에 있는데, 보이는 것도 없소, 대답이 없어. 가만 보니 작은 노움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여. 은신을 하고 있다니... 도둑놈, 아니 도적이셨군!
『ㅇㅇ』
드디어 답을 하셨어. 그리고 또 다시 들판 저 멀리까지 들릴 것 같은 소리 『스륵 슥슥슥』
지금까지 사냥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비교를 해보려 해도 골드문보다 경험자이자 선배였어. 그래서 보통은 공유하는 퀘가 어느 정도인지 보고 맞춰서 따라가거나 분위기를 보며 전투를 했었는데, 마적님은 짤짤 거리면서 돌아다니지도 않고 말도 많이 아끼는 것 같았어.
그래서 분위기를 파악하다 골드문식의 따라쟁이 사냥은 바로 포기하고, 리드를 해보기로 했어. 마적님은 선배가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그냥 어디까지나 수줍음 많고 과묵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슬슬 돌면서 아무거나 잡을까요?』
별 대답은 없지만 이쪽으로 앞서가면 어느새 같은 몹을 잡고 있어. 맘대로 사냥이지만 나름대로 이심전심형 파티라고나 할까.
『오호호홋! 이 기세로 몹이 있는 곳을 따라서 저주받은 땅을 훓고 다녀야지. 몹들아 각오해라!』
『...』
이런 농담도 통하지 않아.
과묵함, 과묵함, 맞아 ... 그냥 편안함 이라고 해두자고.
내 말을 무색하리만치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몹들의 비명 소리와 이 마저도 은근히 가려버리는...
『스륵 슥슥슥』
『스륵 슥슥슥』
『슥슥슥...』
마적님의 무두질 소리 뿐이었다.
그래, 마적님은 무지무지 과묵한 분이야!
『스륵 슥슥슥, 스르르륵 슥슥슥 ... 』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아니 ‘무반주 무두 칼질 조곡’ 같은 무두질 소리를 따라 저주받은 땅을
가르며 하루를 보냈지.
운고로에도 예외없이 무두질 조곡은 울려퍼지고
며칠 후 분위기 좀 바꿔볼까 하고 운고로 분화구로 향했어.
저주받은 땅은 골드문에게 너무 벅찼거든. 전사와 함께 하거나 파티라면 모를까, 이놈의 몹들이 여행자들에게 굶주린 데다가 튼튼하기마저 해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어.
타나리스에서 받은 ‘운고로의 흙’인가 하는 퀘인데, 운고로 지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흙더미를 20개 모아오라는 퀘였어. 운고로가 아무리 험한 들 혼자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 찾아갔지. 그리고 가는 길에 함께할 여행자를 찾아보니 의외로 한 두 명씩 모여들었어.
쥬라기 공원을 연상시키는 듯한 정글과 공룡들... 유전자 조작이 된 듯한 트리세라톱스나 안킬로사우러스, 티라노 사촌들이 골고루 모여있는 것 같았어.
분위기 맘에 들고, 마침 구마적님이 접속했길래 파티의 남은 한 자리에 불러오고 싶었어. 골드문 같은 약골에게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주받은 땅은 퀘스트를 무한 반복한다는 장점을 빼면 퀘 자체의 무미 건조하여 재미없는 편이거든. 그래서 조금이라도 활기를 띄는 이 곳에 불러오고 팠어. 지루한 곳은 사람을 지치게 하잖아.
『마적님, 운고로 오실래요?』
길드 창에 뿌린 이 메시지는 30만 광년의 은하수를 넘어 지구를 21바퀴 반 돌고 난 후에야 이웃 동네 메아리처럼 내게로 돌아왔어.
『ㅇㅇ』
간결, 명료하지. 그래서 파티를 맺고, 하고 있던 퀘에 집중하고 있었어. 누군가가 골드문이 흑마란 사실을 일깨워주어 마적님을 소환해 부른 뒤 폭탄 투하를 하듯 운고로 퀘를 공유하고, ‘고고고’를 외치며 몹들을 잡아나갔지.
한창 몹을 잡을 때는 모르지만 다들 퀘스트를 하다가 완료할 시점이 되면 몇 개 남았는지 확인하는 게 인지상정이잖아, 그래서 우리 파티의 사람들도 퀘스트 아이템 개수들을 확인하고 있었어.
그러다 파티에 늦게 합류한 마적님에게도 질문 공세가 떨어졌지.
그런데 정작 질문 공세의 스폿라이트를 받은 마적님은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야.
『...』
『마적님이 워낙 과묵하세요... ^^;;』
바로 그 뒤를 잊는 소리는
『 슥슥슥...』
그랬어, 언제 어느 곳에서도 마적님의 무두질 소리는 위대했어.
몹들이 튀어 나오고 어느새 파티는 수다 모드를 잊고 다시 바쁘게 돌아갔어.
잃지 마소, 그 스타일
『독타라서... 이해하세요.』
알고 있었어. 뭐 어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아.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유유히 무두질을 하는 마적님, 현실을 건너와 아제로스에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어. 난 그 세계가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바꾸는 걸 원하지 않아.
‘스륵 슥슥슥’, 어느새 이 소리가 친근하게 들려. 언제 또 다시 스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적님이 그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