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롤로 피오 체사레 2003 / Italy > Piemonte > Barolo / 14.5% 맑고 선명한 석류 빛, 복잡한 과일 향과 꽃향기. 사진은 안 찍었다.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 이쯤 해서 한번 마셔주셔야지 않을까, 이런 컨셉으로 바롤로 모임이 성사되었다. 피에몬테의 바롤로 지역에서 나오는 넘들만도 워낙 많은지라 가격대를 설정해 놓고, 이 범주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마실만한 것이 있는 것을 찾았다.
후보는 Cannubi, Cerequio, Pio Cesare, Bussia 이렇게 4종류를 놓고 칸누비 정도가 어떨까 했는데, 전화로 통화했던 가격보다 몇 만원을 높게 불러 신뢰성이 약간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바롤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는 샵 직원의 권유를 바탕으로 피오 체사레로 낙점했다. 사실 2003년산 이라 약간은 고민이 있었지만 2002년보다 괜찮다는 평이 자자하다 하여 자잘한 걱정들은 뒤로 물리고 그냥 그넘을 결정했다.
이번엔 어디까지나 바롤로를 바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최상의 모습이 아니라도 이게 바롤로구나 그런 인상 정도를 받고 싶었다.
바로 자리를 옮겨 좀 전에 골랐던 놈을 오픈하는 시간.
병을 오픈하자 잘 익은 베리향, 농익은 이라고 해야 할까 진하고 단 베리 향과 꽃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오오, 역시 바롤로는 그냥 오는 게 아닌가 보다.
와인의 왕을 영접하는 것이다. 두구두구...
맑고 선명한 석류 빛에 가까운 색에 첫 잔의 인상은 과즙이 풍부한 잘 익은 베리향과 여러 가지 꽃 향기가 섞여 있는 향에 드라이할 거라는 선입관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리 무겁지도 않고 신선하고도 상큼한 맛이었다.
꽃 향기라는 표현이 참 애매한데, 사실 다르게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을 많이 머금은 꽃잎이 부서지는 향이라고 해야 할까? 브루고뉴 와인을 뭉긋뭉긋 피어 오르는 꽃 향기에 표현한다면 이놈의 향기는 꽃다발을 후리쳐서 꽃 잎들이 확 퍼져 나가는 것 같은 향기라고 굳이 말하고 싶다.
빛깔은 아주 맑고 고운 석류 빛에, 점성이 적고, 약간 드라이하며 타닌이 많이 느껴지지 않고 상쾌하며 미디엄 바디 정도의 뒷맛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갓 익은 술 같은 신선함이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5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 것 같은 이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기대하고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을 영접하겠다는 심리적인 기대로 혼자 들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놈 좀 잘 보살펴서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좀 늦게 디켄터에 넣고 돌려보았는데, 바 직원이 생각보다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따르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 막 디켄터에 들어간 놈이 몇 번의 회전으로 원더우먼처럼 변신이라도 하고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지, 잔은 급하게 채워놓았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여길 일부러 간 것은 뭔가 균형을 잡으려 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거늘, 더 조급하게 하는 것이 내가 그냥 할 것을 하는 후회를 하게 했다.
항상 와인의 본질을 파헤치고 표현하고 보다는 함께하는 사람과 마시는 것에 더 열을 올리다 보니 내가 마시는 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고 테이스팅이란 것 역시 동떨어져 있는 게 내 현실이었다. 어제도 역시 그랬던 것 같고. 이젠 바에 가서도 좀더 적극적으로 나의 술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 한번 마셔주겠으' 라고 큰소리 치고 달려든 것 치고는 역시 좀 더 겸손해져서 오라는 듯한 바롤로의 계시를 듣고 온 시간이었다.
한 잔만 쏟더라도 탁자하나를 충분히 적실 붉은 색이건만 반 병 정도를 마시고도 과연 바롤로는 어떤 것이지, 이게 어떤 맛을 내게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답도 얻어오지 못했다. 하얀 식탁보만큼도 못 되는 내 혀를 탓해보기도 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너는 아직 왕을 영접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바롤로 지역의 작은 거절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제각각 들떠있는 듯한 맛과 향들이 어우러져 나를 동하게 할 날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제가 그렇지 않았고, 나에겐 아직도 많은 날들이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