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igny Montrachet 2003 / France > Bourgogne > Cote De Beaune > Puligny Montrachet Chardonnay 100% 2006 구입
맑고 밝은 호박색에 꼬릿하지 않으면서 오래 묵은 듯한 부드러운 짚 향이 가득하다. 바닐라 향과 서양배를 섞은 듯한 달큰함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우아한 맛에 드라이하지만 깔끔한 뒤끝까지 정말 탄성이 나올만했다.
생각도 없이 무전취식을 하겠다며 넉살 좋게 들이대는 여행자를 성긴 밀짚 모자를 쓰고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는 한적한 농장의 점잖은 주인처럼 서두르지도 방정 맞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 훈훈한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은 먹어도 잘 모르겠고 취향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어쩌다가라도 마주하는 것은 저질 화이트 와인 정도였다. 그래서 좋은 걸 한번 먹어보자는 마음에서 멋도 모를 때 사 둔 것이었는데, 딱히 기회도 없고, 스스로가 미덥지 않은 면도 있어 그냥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것이다.
더운 여름 날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먹어야지... 이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이놈이 아주 신선하고 멋진 맛을 선사해 주었다. 이참에 샤샨뉴와 바타드도 한번 마셔봤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해진다.
내 드링킹 라이프에 정말 "멋지다"는 말을 줄줄 쏟아지게 한 와인이다. 내가 직접 골라서 샀던 와인이라 더욱 기쁘기도 하고. ^ㅅ^
Chateau Batailley 1999 / France > Bordeaux > Pauillac Grand Cru Classe 5등급
토요일 로비 군 부부가 오디오를 들으러 온다고 했는데, 새 캐릭터를 미리 만들겠다는 플럼 군도 합세하여 갑자기 술판이 벌어졌다. 술판이라고 하기엔 소소한 자리였지만 플럼 군이 지난번부터 먹자고 벼르기만 하던 바타이를 들고와서 대낮부터 한잔하게 되었다.
세금이 없어서 와인 사기에 좋다는 두바이 면세점에서 샀다고 하는데, 술 사기에는 좋은 곳일 것 같아도 40-50도를 넘는 날씨를 생각하니 와인에게는 꼭 좋은 곳이 아닐 것 같다.
점심을 먹고 가볍게 포엑스(XXXX)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본격적으로 바타이 탐구에 들어갔다. 실은 신문지에 꽁꽁 싸 매가지고 와서 실온에 놔두어 덥혀지는 것을 기다린 것도 있고, 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병을 세워 좀 가라앉힐 필요도 있었다.
바타이 99년산 이라고 하면서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새 10년이란 시간을 묵힌 놈이 되어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브리 한 덩이와 담백한 녹차 크래커를 두고 병을 열었다.
조심스레 코르크를 잡아 빼니 두바이에서 왔다라고 말하듯 코르크의 1/4쯤은 잠시 넘었던 듯 와인이 스몄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병을 열자마자 은은하게 풍겨오는 부드러운 향기. 보르도의 꼬릿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와인을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와인의 특성을 과장하여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때가 있다. 이 특성이라는 것은 꼭 집어 말하기도 어렵지만 꼭 근사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때도 있다.
보르도에 대한 내 첫인상은 보통 꼬릿함의 즐거움으로부터 시작하는 때가 많다. 좀 묵은 넘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꼬릿함이 깃들어 있고, 어떤 넘들은 석유 화학 제품 같은 광물성 향이 짙게 깔려 있는 매캐한 꼬릿함도 있다.
가장 자리에 엷은 빛을 띤 보라색과 노란색의 중간을 띈 자수정 빛깔이 오랜 시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자수정을 직접 본 적이 있나? 어렸을 적 자수정을 본 일이 있었다. 자수정이라고 하면 보랏빛의 뭔가를 떠올렸었는데, 실제 색깔은 갈색과 자주색의 중간 같은 색깔이었다. 그 후로 자주색 하면 채도 높은 밝고 화려한 어떤 색깔을 떠올리기 보다는 그늘진 눈물 같은 그 보석 빛깔이 떠올리곤 한다.
약한 벽돌색이 도는 자수정 빛깔에 약간은 탁한 기운이 돌았지만 향은 오후의 담배 향처럼 부드럽고도 중후함이 깃들어 있었다. 묵직하긴 하지만 타닌은 강하게 인식되지 않았고 시시각각 부드럽게 풀어지듯 매끄럽게 마실 수 있었다.
따르고 난 병을 보니 찌꺼기가 제법 되었다. 이런 와인은 찌거기를 거르는 목적만으로도 디캔팅이 필요할 것 같았다. 향긋함을 음미하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잔이 비고, 병에 남은 것을 탈탈 털어 조금씩 나누었다. 오래 지켜보며 먹기에는 사람이 조금 많았다고 서로 한탄을 하면서.
첫 와인의 인상이 좋아서 어줍잖은 다른 것을 더 따기가 뭐해 그냥 거기서 마무리 했다. 이미 음악 감상과 노닥거리는데 시간을 많이 보낸 것도 있고, 운전을 해야 할 이들이 있어서 대낮의 와인과 함께는 마감을 했다.
로비 군 부부는 서브 시스템을 업어갈 자세로 집에 와서는 메인인 Creek 앰프를 업어갔다. 날을 세운 듯 섬세한 소리를 전해주던 인피니티와 Creek 조합은 이제 로비 군 집에나 가야 듣을 수 있는 것이다. (2008-05-31)
바롤로 피오 체사레 2003 / Italy > Piemonte > Barolo / 14.5% 맑고 선명한 석류 빛, 복잡한 과일 향과 꽃향기. 사진은 안 찍었다.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 이쯤 해서 한번 마셔주셔야지 않을까, 이런 컨셉으로 바롤로 모임이 성사되었다. 피에몬테의 바롤로 지역에서 나오는 넘들만도 워낙 많은지라 가격대를 설정해 놓고, 이 범주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마실만한 것이 있는 것을 찾았다.
후보는 Cannubi, Cerequio, Pio Cesare, Bussia 이렇게 4종류를 놓고 칸누비 정도가 어떨까 했는데, 전화로 통화했던 가격보다 몇 만원을 높게 불러 신뢰성이 약간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바롤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는 샵 직원의 권유를 바탕으로 피오 체사레로 낙점했다. 사실 2003년산 이라 약간은 고민이 있었지만 2002년보다 괜찮다는 평이 자자하다 하여 자잘한 걱정들은 뒤로 물리고 그냥 그넘을 결정했다.
이번엔 어디까지나 바롤로를 바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최상의 모습이 아니라도 이게 바롤로구나 그런 인상 정도를 받고 싶었다.
바로 자리를 옮겨 좀 전에 골랐던 놈을 오픈하는 시간.
병을 오픈하자 잘 익은 베리향, 농익은 이라고 해야 할까 진하고 단 베리 향과 꽃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오오, 역시 바롤로는 그냥 오는 게 아닌가 보다.
와인의 왕을 영접하는 것이다. 두구두구...
맑고 선명한 석류 빛에 가까운 색에 첫 잔의 인상은 과즙이 풍부한 잘 익은 베리향과 여러 가지 꽃 향기가 섞여 있는 향에 드라이할 거라는 선입관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리 무겁지도 않고 신선하고도 상큼한 맛이었다.
꽃 향기라는 표현이 참 애매한데, 사실 다르게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을 많이 머금은 꽃잎이 부서지는 향이라고 해야 할까? 브루고뉴 와인을 뭉긋뭉긋 피어 오르는 꽃 향기에 표현한다면 이놈의 향기는 꽃다발을 후리쳐서 꽃 잎들이 확 퍼져 나가는 것 같은 향기라고 굳이 말하고 싶다.
빛깔은 아주 맑고 고운 석류 빛에, 점성이 적고, 약간 드라이하며 타닌이 많이 느껴지지 않고 상쾌하며 미디엄 바디 정도의 뒷맛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갓 익은 술 같은 신선함이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5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 것 같은 이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기대하고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을 영접하겠다는 심리적인 기대로 혼자 들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놈 좀 잘 보살펴서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좀 늦게 디켄터에 넣고 돌려보았는데, 바 직원이 생각보다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따르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 막 디켄터에 들어간 놈이 몇 번의 회전으로 원더우먼처럼 변신이라도 하고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지, 잔은 급하게 채워놓았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여길 일부러 간 것은 뭔가 균형을 잡으려 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거늘, 더 조급하게 하는 것이 내가 그냥 할 것을 하는 후회를 하게 했다.
항상 와인의 본질을 파헤치고 표현하고 보다는 함께하는 사람과 마시는 것에 더 열을 올리다 보니 내가 마시는 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고 테이스팅이란 것 역시 동떨어져 있는 게 내 현실이었다. 어제도 역시 그랬던 것 같고. 이젠 바에 가서도 좀더 적극적으로 나의 술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 한번 마셔주겠으' 라고 큰소리 치고 달려든 것 치고는 역시 좀 더 겸손해져서 오라는 듯한 바롤로의 계시를 듣고 온 시간이었다.
한 잔만 쏟더라도 탁자하나를 충분히 적실 붉은 색이건만 반 병 정도를 마시고도 과연 바롤로는 어떤 것이지, 이게 어떤 맛을 내게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답도 얻어오지 못했다. 하얀 식탁보만큼도 못 되는 내 혀를 탓해보기도 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너는 아직 왕을 영접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바롤로 지역의 작은 거절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제각각 들떠있는 듯한 맛과 향들이 어우러져 나를 동하게 할 날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제가 그렇지 않았고, 나에겐 아직도 많은 날들이 있다는 거다.
Nerojbleo 2002 Gulfi / Nero d'Avola / Italy > Sicilia
수서동. HJ, 로비군 부부, 우리 부부 (2008-03-06)
① Gosset 샴페인 ② Nerojbleo 2002 ③ Brane Cantenac 2001 ④ Marsanny ⑤ Palazzo Della Torre
생굴, 야끼 소바, 시저 샐러드, 고로케, 중국식 왕만두, 소시지, 딸기 등 현대백화점 식품 코너의 먹거리들과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살라미들, 치즈(일명 개껌 같이 생긴 것도 맛있었는데, 3개 국어가 적혀있지만 영어는 없어서 정체는 잘 모른다).
보통 한 잔씩만 마시는데, 리델 소믈리에 잔 덕분에 생각보다 많이 마신 것 같다. 이게 좀 커서 말이지. 그런데 막상 리스트를 나열하고 보니 병 수도 많구나. 항상 마지막은 참았으면 하는 생각이 나는데, 이건 다음 날 생각일 뿐인 것 같다. 다음에 모이면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하니 말이다. (써 놓고 보니 다섯 명이 다섯 병 = =)
굴피 와인,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무난하고 부드러운 맛을 보여 줬다.
약간 탁한 붉은 색에 신선함이 있지만 덜 여문 향은 아니었다. 보르도 와인에서 많이 느낄 수 있는 초반 화학적인 향 같은 것이 내가 접한 이태리 와인에서는 적거나 아주 쉽게 걷히는 편이다. 이놈도 그런류라서 처음부터 기꺼이 즐기면서 마실 수 있었다.
신선하고 우아한 과일향, 타닌은 약간, 산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목넘김이 아주 부드러웠다. 부드러우면서도 싱겁지 않은 미디엄 바디 정도의 와인. 메인 식사와 함께나 고기가 없이 과일과 함께 먹기에 좋은 와인 같다.
마시다가 숙성 중인 맥주 한잔씩 맛 보시고, 커피 로스팅 하는 거 보다가 또 마시다가... 노획물로 로스팅한 커피도 얻어왔고, 노쇠하여 좀 피곤한 것만 빼면 딱 좋다. (2008-03-07)
굴피 시리즈는 빈앤빈 시칠리 와인 시음회에서 여러 병 딴 것 같은데, 기억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시칠리는 내 고향 바닷가도 아닌데, 왠지 친근하다. 어느 저녁에 딸지 모르지만 일단 한병 들고 왔다. 레뱅드매일에서 딱 맘에 드는 것을 보이지 않아서 물어봤더니 이태리 와인 컬렉션을 교체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프랑스와 칠레에 밀려 개성 강한 이태리 와인이 환영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이런. 덕분에 생각보다 할인율이 높았던 넘인데, 굴피도 퇴출 당하는 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다. 데일리 와인의 가격대가 넘 올라가면 안 되는데, 좀 저렴한 넘들이시여 들어오소서.
슬슬 여유있게 하려고 했는데, 실패. 건조함이 하늘을 찔러서 그러는지 한겨울 보다 정전기 발생이 심해졌다. 덕분에 트래드밀 위에서 낙사할 뻔 했다. 간혹 멈춰서는 경우에도 적절한 순발력이 나온다 싶었는데, 어제는 정말 예상외의 정지로 놀랐다. 이거 원 위험해서... 빨리 따땃한 봄이 되어야 밖으로 나설텐데, 밤 늦은 시간은 여전히 춥다. 베란다란 공간도 춥기는 매한가지지만 밤공기와 함께하면 집보다는 낫지 싶다. (2008-03-05)